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마 공화국 (문단 편집) === [[유구르타 전쟁]] === 그 와중에 누미디아 왕국의 왕이었던 [[유구르타]]가 로마에 반기를 들어 '''[[유구르타 전쟁]]'''이 발발하였다. 이 전쟁에서 로마가 승리함으로써 두각을 나타낸 [[가이우스 마리우스]]는 군제를 '''[[징병제]]에서 [[모병제]]로 개혁함으로써 무산자 계급을 로마 군단으로 흡수한다.'''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은 당시에는 매우 적절한 개혁으로 여겨졌지만 문제는 이 개혁이 군벌을 양산하는 결과를 낳아 공화정을 무너뜨린 주범 중 하나로 보기도 한다. 근본적인 토지 개혁이나 자본 구조의 개편 없이 단순히 징병제를 모병제로 바꾼 관계로 재원 마련은 물론 지휘관의 사병화가 촉진되었다.[* 물론 애시당초 중산층이 무너진 데다가 이를 되돌릴 개혁을 무시했으니 마리우스만을 탓할 일은 아니다. 당장 군대는 필요하지만 정작 기존의 방식으로는 더이상 모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.] 상승 장군으로 유명했던 마리우스는 자신이 이끌던 군단병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고, 결국 이런 지지가 사병화를 촉진해 국내 [[쿠데타]]도 성공시켰다. 이를 본받은 후계자인 술라와 폼페이우스 등이 [[쿠데타]]와 월권 행위를 저지르면서 공화정의 근간이 무너져 결국 제국으로 가는 결과를 낳았다. 이후 이 새로운 형태의 군단병으로 30여 만명에 달하는 게르만족의 이탈리아 남하를 격파함('''[[킴브리 전쟁]]''')으로써 모병 제도를 로마에 확립시켰다. 그러나 이들에게 전역 후에 지급했던 농토 배분 문제로 인해 다시금 원로원과 마찰을 겪게 되었고 마리우스파였던 호민관 사투르니누스가 그라쿠스 형제가 발의한 것과 똑같은 형태의 농지법, 즉 국유지를 마리우스 군단병에게 퇴직금으로 나눠주는 것을 골자로 한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하다 다시 원로원의 반발로 인하여 목숨을 잃게 되었다. [[가이우스 마리우스|마리우스]]는 현직 집정관으로써 이러한 사태를 수습하지 못해 신뢰를 잃게 되어 정치적으로 실각하고 만다.[* 마리우스든 술라든 어디까지나 무골일 뿐 당시 로마가 필요로 하던 정치가는 아니어서 혼란을 수습하지는 못했다. 거기다 마리우스는 타이밍 좋게 죽는 바람에 본인은 크게 해를 입지 않았지만 그를 따르던 민중파에게는 그야말로 재앙과도 같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